홀론(Holon) 이론과 반복되는 의료 개혁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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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0회 작성일 26-01-0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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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선의 정책 딥 마이닝
우리나라는 민주화를 이룬 이래 현재까지 의료와 교육에 관한 ‘개혁 기구’를 설치해 보지 않은 정권이 없다. 이제는 검찰도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설립한 의료 개혁 기구가 존재하는 이유는 개혁이 점진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저항으로 실패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동안 ‘저항’과 ‘반대’에 대한 숙의와 협상 대신 전문직과 등을 돌리고 전문직의 도덕적 문제를 끄집어내 개혁의 본질을 변질시켰다. 개혁의 중점 사안은 해결의 노력을 뒤로 한 채, 엉뚱한 문제로 본말이 전도된 채 그 방향을 잃었다. 정권마다 보여주는 의료 개혁의 실패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보건의료에 대한 거버넌스 설계의 구조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인데, 정부는 오로지 중앙집권적 명령과 통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전통적 개혁 접근 방식은 의료공급자를 포함한 주요 행위자를 의료체계의 단순한 ‘부분’이나 ‘관리 대상’ 혹은 통제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정부의 강력한 규제에 따라 전문직의 내키지 않는 단기적 순응은 확보할 수 있으나 전문직의 지속 가능한 협력과 성과를 담보하지 못하였기에 때마다 실패한 것이다.
상호 유기적 특성의 ‘홀론’처럼 과도한 미시적 통제 체계에선 저항과 회피 자동 반응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회 각 분야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정책적 충돌과 잡음은 Arthur Koestler의 ‘홀론(Holon) 이론’을 빌려 설명이 가능하다. 홀론 이론은 복잡한 사회나 생물체, 조직 시스템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으로 발전해 왔다. ‘홀론’이란 자기 완결형인 스스로 전체(whole)이면서 동시에 자신보다 더 큰 상위 체계의 부분(part)으로서 기능한다. 이를 의료체계에 적용해 보면 다양한 ‘홀론’이 존재하는데, 어떤 홀론도 단순히 부분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각 홀론은 자율성과 내부 규범, 생존 논리 등을 지닌다. 그리고 시스템의 안정성과 성과는 상, 하위 홀론 사이의 자율성과 통제의 균형에 의해 결정된다.
홀론(Holon) 이론에 따르면, 건강보험 체계의 각 행위자는 자기 완결적인 전체이자 상위 체계의 한 부분으로 기능한다. 상위 홀론인 정부나 국회, 사법 체계 등에 의한 과도한 미시적 통제는 하위 홀론의 자율성과 전문직의 정체성을 훼손한다. 그 결과로 방어적인 진료와 생존을 위한 본능적 비급여 확대, 제도 회피, 정책적인 저항 등과 같은 적응적 행태가 구조적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의료 개혁의 핵심 과제는 다양한 의료체계 내의 홀론에 대한 새로운 규제의 도입이 아니라, 각 행위자가 홀론으로서 자주적으로, 그리고 특히 상위와 하위 홀론과 유기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거버넌스를 재설계하는 데 있다.
홀론은 사회 속에 다양한 기구로 존재한다. 다양한 전문직 단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전체이자, 더 큰 상위 체계인 의료체계나 사회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며 역할을 한다. 다양한 사회적 중계단체인 홀론은 각자 자기 스스로 해야 할 몫이 존재한다. 홀론의 자율적이고 유기적인 참여 없이는 전통적인 거버넌스인 명령과 통제는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보여주는 관료 중심적인 체제는 군사 정권과 개발 중심의 독재 시절에 잘 부합되어 성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는 경제 대국과 민주화의 성과를 기반으로 삼아 보다 더 정교하고 높은 수준의 성숙한 보건의료 분야의 거버넌스를 운영할 필요가 있다. 이제 정부는 통제적 관료 중심 거버넌스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경계조건(boundary condition) 중심 거버넌스’로 전환해야 한다. 경계조건은 개별 행위의 통제가 아닌 재정 총량, 성과 목표, 책임 범위 등을 의미한다. 현행 보건 분야의 거버넌스는 정부가 모든 진료 행위를 비롯해 가격, 급여 기준에 대한 미시적 통제에 과도하게 개입하며 의존하고 있다. 이는 단기적 관리에는 효과를 볼 수 있으나, 좀 거시적으로 보면 의료공급자의 자율적인 협력과 제도 내 혁신을 저해하는 구조적 한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의료공급자는 단순한 서비스 제공자가 아니라, 임상적 판단과 높은 윤리의식이 내재된 ‘전문직 홀론’이다. 가이드 라인, 급여 기준, 질 평가 지표 등 핵심 규칙은 정부 주도의 일방적 설계가 아니라 전문직 집단과의 공동 설계(co-design) 방식으로 정책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이는 규제 완화가 아니라, 자율성과 사후 책임을 결합한 새로운 규율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건강보험공단도 하나의 홀론으로 작동해야 한다. 현재 복지부 관할 하에 재정 관리와 정책 집행 기능에 집중되어 있으며, 전략적 구매자 역할은 제한적으로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홀론 관점에서 공단은 단순 집행기관이 아니라 중간 수준의 ‘핵심 홀론’으로 재정의될 필요가 있다.
정부의 의료 개혁이 성공하려면 왜 반발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통찰하고 숙의해야
정부 정책에 저항하는 의사단체도 하나의 중요한 홀론이다. 의사단체의 저항은 정부의 약한 통제나 의사의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보건 거버넌스 설계 이상을 나타내는 시스템 이상의 신호다. 의료공급자는 외부 규제와 단순히 경제적 인센티브에 반응하는 수동적 관리 대상자가 아니다. 상위 홀론의 통제가 의료공급자 홀론의 자율성을 심하게 침식할 경우, 순응이 아닌 ‘적응적 저항(adaptive resistance)’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불균형적인 홀론의 배열인 ‘국민 참여 의료혁신위원회’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지역 단위 중간 홀론의 제도화를 형성하여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우리나라 건강보험 체계는 개인 의료공급자와 중앙정부를 직접 연결하는 구조로, 조정과 완충 기능을 수행할 중간 수준의 홀론이 제도적으로 취약한 구조를 지닌다. 지역 책임 의료체계, 1차 의료 네트워크, 전문 과목 단위 협력체계 등 지역과 전문 단위의 중간 홀론을 제도화함으로써, 전달체계의 안정성과 정책 수용성을 동시에 제고할 필요가 있다.
개혁 과정에서 나타나는 공급자의 저항은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거버넌스 설계에 대한 불균형을 지적하는 것이다. 정부는 정책 추진 과정에서 저항의 형태와 지점을 분석하고 파악하여 통제 강화가 아닌, 설계 수정이나 변경의 근거로 활용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의료체계의 지속가능성은 재정 관리나 규제 강화만으로 확보될 수 없다. 각 행위자가 자율성과 책임을 동시에 갖는 홀론으로서 작동할 때, 제도는 안정성과 적응력을 함께 확보할 수 있다. 향후 의료 개혁이 한 번이라도 성공해 보려면 기존의 명령과 통제의 논리를 넘어, 공존과 조정의 거버넌스 설계로 전환돼야 할 것이다.
출처 : 청년의사 (https://www.docdocdo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3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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